고통에 관하여

Misc.2008. 4. 26. 21:57 |
Smith 말대로,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는 건지도 모른다. 시험기간만 되면 평소에 보지도 않던 소설책이며 시집이 향기롭게 유혹을 하고, 하고싶은것과 해야하는것 사이의 괴리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하지만 막상 시험이 끝나면 소설책과 시집은 광채를 읽고 다시 먼지가 쌓여가곤 했다.

욕구는 고통이며 희망이고 현실을 인식하는 세포이다. 욕구의 해소는 카타르시스이며 오르가즘이고, 그것은 생각보다 짧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천국이 없는지도 모른다. 시험이 끝나면 꼭 보겠다던 시집이 시험이 끝나는 순간 빛을 잃었던 것처럼, 완벽한 세상역시도 빛을 잃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세상에 들어선 인간들은 인식의 틀로써 또다시 고통이라는 방법을 택할지도 모른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가지지 못했고 그 고통이 클수록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인식은 섬세해졌다. 괴테는 죽기전 마지막으로 손녀딸뻘의 여인을 사랑했다. 소녀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루어질수 없었다. 괴테의 하루하루는 갈망이 더해갔고, 고통스러웠으며, 삶을 인식하는 세포 하나하나는 섬세하고 날카로워졌다.

고통은 쾌락에 도달하는 하나의 채널이다.

나는 맞는게 정말 싫었는데, 어쩌다 뭘 잘못했던 칠판앞에 나가서 엉덩이를 맞아야 할 때가 있었다. 선생님이 무섭다고 악명이 높은 경우,  오금이 저릴정도의 공포를 맛봐야했다. 그런데 막상 맞고 나면 엉덩이는 얼얼하고 화끈거리고 곧 죽을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해냈다"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기쁨이 용솟음치는 것이었다. 특히 맞고나서 제자리로 돌아와 이를 악물고 맞은 부위를 움켜잡으면서 , 아직 맞고있는 녀석들이 괴성을 지르는것을 보거나 다음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녀석들의 겁에 질린 얼굴들을 보면서 나는 분명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생각한다. 어쩔땐 주체할수없는 웃음이 터져나오기도해서 웃음을 참느라 고생한 적도 있었다.

새디스트적인 쾌락은 그런것인지도 모른다. 고통과 해소, 그 둘 사이의 역학관계. 고통이 클수록 해소되는 순간의 쾌락은 크다. 선생님이 무서울수록 맞고나서 "다맞았다"는 기쁨이 컸던 것처럼... 혼자 좋아하던 사람 때문에 끙끙거릴때, 일생일대의 중요한 시험에서 낙방하였을때... 그러한 모든것들은 욕망과 고통하고 관련이 있다. 이루지 못하는 고통이 큰만큼 욕구가 해소되는 순간 쾌락의 정도는 크다.

무소유의 기쁨은 욕망의 포기이다. 욕망은 고통이라 욕망이 없으니 고통도 없다. 하지만, 욕망이 없으면 해소에 따르는 쾌락도 없다.  곧, 무소유는 고통의 포기이며, 쾌락의 포기이다. 욕망의 해소가 불러오는 쾌락은 강하지만 짧고, 욕망의 포기가 불러오는 기쁨은 길지만 약하다.  욕망이라는 고통에 가득찬 인간의 세포가 날카롭고 섬세한것과는 달리 욕망을 포기한자의 세포는 무디고 둔하다.